물계서원
물계서원 (勿溪書院)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79
문화재지정
물계서원소장책판 -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6호(1990.01.15지정)
물계서원 원정비 -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6호(2005.01.13지정)
배향인물
문화재지정
물계서원소장책판 -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6호(1990.01.15지정)
물계서원 원정비 -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6호(2005.01.13지정)
배향인물
侍中公 송국(松國), 怡軒 여완(汝完), 東皐 준득(準得), 貞節 사제(思齊), 獨谷 석린(石璘), 忠肅 승(勝), 仁齊 희(熺), 梅竹軒 삼문(三問), 文斗 담수(聃壽), 聽松 수침(守琛), 節孝 수종(守琮), 大谷 운(運), 東洲 제원(悌元), 板谷 윤해(允諧), 牛溪 혼(渾), 判書 수경(守慶), 稼亭 언충(彦忠), 聽竹 람(灠), 滄浪 문준(文濬), 浮査 여신(汝信), 芙蓉堂 안의(安義)
창건연도 : 1712년(숙종 38)
향사일 : 2월 중정(中丁)
연혁
1712년(숙종 3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성송국(成松國), 성삼문(成三問), 성담수(成聃壽),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성제원(成悌元), 성혼(成渾), 성윤해(成允諧)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성여완(成汝完), 성희(成熺), 성수경(成守慶), 성문준(成文濬), 성람(成?), 성여신(成汝信) 등을 추가 배향하고, 1814년(순조 14) 성안의(成安義), 1857년(철종 8)에 성준득(成準得)을 추가 배향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89년 서원을 복원하고 1997년에는 영의정 문경공(文景公) 성석린(成石璘), 진사 성언충(成彦忠)을 추가배향하였다.
건축물
사우인 숭덕사(崇德祠), 신문인 현도문(顯道門), 강당인 중부당(中孚堂), 정문인 이현문(?賢門)이 일직선을 이루며 전학후묘의 배치를 보인다. 강당 앞의 동재인 일치재(一致齋)와 서재인 겸해재(兼該齋)가 갖추어져 있으며, 강당의 동편에는 유물각인 영보각(永寶閣)이 있다.
부속 건물로는 제수를 장만하는 전사청, 관리사, 관리사 문 등이 있어 규모가 매우 크다. 숭덕사는 3칸, 신문도 3칸 규모이다. 강당은 전면에 물계서원 현판을 달았으며 6칸 규모 중 3칸은 방으로, 가운데 3칸은 당으로 구성되었다. 동재와 서재는 전형적인 3칸 규모를 이루며 , 영보각은 3칸 건물이다.
1) 물계서원 원정비 (勿溪書院院庭碑) -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6호 (2005년 지정)
물계서원 원정비는 건립연대가 1790년(정조 14)으로 확인되는바 시기상으로 보아 200년 이상이 되었고, 형태면에서도 18세기 후기에 많이 보이는 비석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옥개석 양 측면에 조각되어 있는 쌍조의 모습과 옥개석 앞뒤 밑 부분에 2단씩 조각되어 있는 연목(椽木=서까래) 형식은 목조가옥의 지붕을 연상케 해주어 독특한 감이 있으며, 이 비석의 비문 내용으로 보아서 물계서원의 유래와 배향인물 19명의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경우 친자인 이복원(李福源)은 후일 정조 때 우상(右相)과 좌상(左相)을 역임한 인물로 학행이 있었고, 글쓴이 조윤형(曺允亨)은 당시 필법으로 명성을 떨친 분으로 이 원정비의 격을 한층 높여 주고 있다.
2) 물계서원 소장 책판 -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6호 (1990년 지정)
가로 22㎝, 세로 49㎝의 규모를 지닌 이것은 성리학의 대가 성혼(成渾)선생의 문집책판으로 284매로 되어있다. 우계문집(牛溪文集)은 원집 6권과 속집 6권으로 1621년(광해군 13)에 성문준, 김집, 안방권 등 우계문인들이 우계집을 발간했는데, 이것이 우계집의 원집이었다.
우계속집은 숙종 8년에 공주감영에서 간행되었고 중간본은 1809년(순조 9) 성금주가 원집과 속집을 합쳐서 밀양에서 간행했는데, 우계원집이 광해군 초에 만들어진 까닭에 당시 집권당이 꺼려하는 부분은 많이 삭제되어 다시 속집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① 두문동 선생 실기책판 (杜門洞先生實記冊板)
태조 이성계의 등극을 반대해 만수산에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삶을 마쳐 고려조에 대한 절의를 나타내었던 정절공 성사제 선생(貞節公 成思齊先生)의 행적과 개성(開城)의 표절사(表節祠)에 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직제학 벼슬을 지냈던 정절선생의 인품이 잘 나타나 있는 이 판각(板刻)은 총 33매로 가로22㎝, 세로53㎝이다.
② 창녕성씨 문행열전 책판 (昌寧成氏文行列傳冊板)
도학이나 문장 혹은 충헌, 정절, 덕망 등이 뛰어나 국사와 야사에 실린 창녕 성씨 명현(名賢) 147명의 행적을 기록한 목판으로 일찍이 선세의 행적을 모았던 문헌지(文獻誌)가 유실된 관계로 1884年 성근묵과 성재숭이 공저로 펴낸 책자의 판각이다. 총 70매이며, 고종 37年 3月(1900)에 창녕군 이방면 안리의 우항제(牛項齊)에서 조각한 것이라 전한다.
③ 성시중 효행록 책판 (成侍中孝行錄冊板)
총 46매 판각으로 조선 영조 8년(1732)에 조각하고 시중공(侍中公)의 14대손인 성환(成換)이 편집한 이 효행록은 시중공이 부친의 시신을 지고 먼 길을 온 일화 그의 효행들을 싣고 있으며, 그밖에 이 서원에 배향된 나머지 18현의 행적, 그리고 물계서원의 연혁과 상량문(上樑文), 춘추향제물(春秋享祭物), 규식도(規式圖), 소목열시도(昭穆列侍圖) 등이 기록되어있다. 시중은 고려조의 수상격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의 주향(主享)인 성송국(成松國)을 일컫는다.
④ 창녕성씨 만력보책판 (昌寧成氏萬曆譜冊板)
명나라의 만력(萬歷) 44년 병진년에 판각했다하여 만력보(萬曆譜) 혹은 병진보(丙辰譜)라고 하는 이것은 창녕성씨의 족보를 말하는 것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창녕읍 옥천리의 관룡사에서 조각하여 물계서원에 소장되었다가 서원이 철폐되면서 맥산재(麥山齋)의 영보각에(永寶閣) 옮겨져 보관되어 오고 있다. 최초의 창녕 성씨 목판본으로 가로 28㎝, 세로 68㎝, 22매의 목판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⑤ 창녕성씨 기축보 책판 (昌寧成氏己丑譜冊板)
조선 숙종 35년(1709) 기축년(己丑年)에 새긴 이 판각은 그 당시 흥해 현감(興海縣監) 성환(成換)이 만력보에 이어 다시 만든 창녕성씨 족보이다. 경북 영일군 흥해의 천곡사(泉谷寺)에서 가로28㎝, 세로28㎝로 189매 만들어져 천곡사의 장보각(藏譜閣)에 보관되었다가 물계서원을 거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오시는 길
창건연도 : 1712년(숙종 38)
향사일 : 2월 중정(中丁)
연혁
1712년(숙종 3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성송국(成松國), 성삼문(成三問), 성담수(成聃壽),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성제원(成悌元), 성혼(成渾), 성윤해(成允諧)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성여완(成汝完), 성희(成熺), 성수경(成守慶), 성문준(成文濬), 성람(成?), 성여신(成汝信) 등을 추가 배향하고, 1814년(순조 14) 성안의(成安義), 1857년(철종 8)에 성준득(成準得)을 추가 배향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89년 서원을 복원하고 1997년에는 영의정 문경공(文景公) 성석린(成石璘), 진사 성언충(成彦忠)을 추가배향하였다.
건축물
사우인 숭덕사(崇德祠), 신문인 현도문(顯道門), 강당인 중부당(中孚堂), 정문인 이현문(?賢門)이 일직선을 이루며 전학후묘의 배치를 보인다. 강당 앞의 동재인 일치재(一致齋)와 서재인 겸해재(兼該齋)가 갖추어져 있으며, 강당의 동편에는 유물각인 영보각(永寶閣)이 있다.
부속 건물로는 제수를 장만하는 전사청, 관리사, 관리사 문 등이 있어 규모가 매우 크다. 숭덕사는 3칸, 신문도 3칸 규모이다. 강당은 전면에 물계서원 현판을 달았으며 6칸 규모 중 3칸은 방으로, 가운데 3칸은 당으로 구성되었다. 동재와 서재는 전형적인 3칸 규모를 이루며 , 영보각은 3칸 건물이다.
중요 물건
1) 물계서원 원정비 (勿溪書院院庭碑) -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6호 (2005년 지정)
물계서원 원정비는 건립연대가 1790년(정조 14)으로 확인되는바 시기상으로 보아 200년 이상이 되었고, 형태면에서도 18세기 후기에 많이 보이는 비석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옥개석 양 측면에 조각되어 있는 쌍조의 모습과 옥개석 앞뒤 밑 부분에 2단씩 조각되어 있는 연목(椽木=서까래) 형식은 목조가옥의 지붕을 연상케 해주어 독특한 감이 있으며, 이 비석의 비문 내용으로 보아서 물계서원의 유래와 배향인물 19명의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경우 친자인 이복원(李福源)은 후일 정조 때 우상(右相)과 좌상(左相)을 역임한 인물로 학행이 있었고, 글쓴이 조윤형(曺允亨)은 당시 필법으로 명성을 떨친 분으로 이 원정비의 격을 한층 높여 주고 있다.
2) 물계서원 소장 책판 -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6호 (1990년 지정)
가로 22㎝, 세로 49㎝의 규모를 지닌 이것은 성리학의 대가 성혼(成渾)선생의 문집책판으로 284매로 되어있다. 우계문집(牛溪文集)은 원집 6권과 속집 6권으로 1621년(광해군 13)에 성문준, 김집, 안방권 등 우계문인들이 우계집을 발간했는데, 이것이 우계집의 원집이었다.
우계속집은 숙종 8년에 공주감영에서 간행되었고 중간본은 1809년(순조 9) 성금주가 원집과 속집을 합쳐서 밀양에서 간행했는데, 우계원집이 광해군 초에 만들어진 까닭에 당시 집권당이 꺼려하는 부분은 많이 삭제되어 다시 속집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① 두문동 선생 실기책판 (杜門洞先生實記冊板)
태조 이성계의 등극을 반대해 만수산에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삶을 마쳐 고려조에 대한 절의를 나타내었던 정절공 성사제 선생(貞節公 成思齊先生)의 행적과 개성(開城)의 표절사(表節祠)에 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직제학 벼슬을 지냈던 정절선생의 인품이 잘 나타나 있는 이 판각(板刻)은 총 33매로 가로22㎝, 세로53㎝이다.
② 창녕성씨 문행열전 책판 (昌寧成氏文行列傳冊板)
도학이나 문장 혹은 충헌, 정절, 덕망 등이 뛰어나 국사와 야사에 실린 창녕 성씨 명현(名賢) 147명의 행적을 기록한 목판으로 일찍이 선세의 행적을 모았던 문헌지(文獻誌)가 유실된 관계로 1884年 성근묵과 성재숭이 공저로 펴낸 책자의 판각이다. 총 70매이며, 고종 37年 3月(1900)에 창녕군 이방면 안리의 우항제(牛項齊)에서 조각한 것이라 전한다.
③ 성시중 효행록 책판 (成侍中孝行錄冊板)
총 46매 판각으로 조선 영조 8년(1732)에 조각하고 시중공(侍中公)의 14대손인 성환(成換)이 편집한 이 효행록은 시중공이 부친의 시신을 지고 먼 길을 온 일화 그의 효행들을 싣고 있으며, 그밖에 이 서원에 배향된 나머지 18현의 행적, 그리고 물계서원의 연혁과 상량문(上樑文), 춘추향제물(春秋享祭物), 규식도(規式圖), 소목열시도(昭穆列侍圖) 등이 기록되어있다. 시중은 고려조의 수상격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의 주향(主享)인 성송국(成松國)을 일컫는다.
④ 창녕성씨 만력보책판 (昌寧成氏萬曆譜冊板)
명나라의 만력(萬歷) 44년 병진년에 판각했다하여 만력보(萬曆譜) 혹은 병진보(丙辰譜)라고 하는 이것은 창녕성씨의 족보를 말하는 것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창녕읍 옥천리의 관룡사에서 조각하여 물계서원에 소장되었다가 서원이 철폐되면서 맥산재(麥山齋)의 영보각에(永寶閣) 옮겨져 보관되어 오고 있다. 최초의 창녕 성씨 목판본으로 가로 28㎝, 세로 68㎝, 22매의 목판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⑤ 창녕성씨 기축보 책판 (昌寧成氏己丑譜冊板)
조선 숙종 35년(1709) 기축년(己丑年)에 새긴 이 판각은 그 당시 흥해 현감(興海縣監) 성환(成換)이 만력보에 이어 다시 만든 창녕성씨 족보이다. 경북 영일군 흥해의 천곡사(泉谷寺)에서 가로28㎝, 세로28㎝로 189매 만들어져 천곡사의 장보각(藏譜閣)에 보관되었다가 물계서원을 거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오시는 길